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벨프 가문 (문단 편집) == 벨프 왕조 == 2년 후인 1197년, 바르바로사 황제의 유업을 이어 위대한 [[호엔슈타우펜 가문]]의 [[신성 로마 제국]]을 건설하려 했던 젊고 야심많은 황제 [[하인리히 6세]]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었다. 하인리히 6세의 아들 [[프리드리히 2세]]는 3세에 불과했다. 이에 [[호엔슈타우펜 가문]]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주장하며 벨프 가문의 [[오토 4세]]를 [[독일왕]](황제)으로 지지했다. 반면 호엔슈타우펜 세력들은 어린 프리드리히 2세 대신 하인리히 6세의 동생 [[필립|필리프]] 폰 슈바벤을 [[독일왕]](황제)으로 지지했다. 이에 양 세력이 각각의 후보를 독일왕으로 선출하면서 두 명의 대립 독일왕이 탄생하게 되었다.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필리프가 결국 단독 독일왕이 되었지만 곧 암살당하고 오토 4세가 단독 독일왕이 되었다. 이어 오토 4세가 교황으로부터 정식 대관을 받으면서 벨프 가문 최초의 [[신성 로마 제국]] 황제가 되었다. 그러나 오토 4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교황과 [[호엔슈타우펜 가문]] 및 다른 제후 세력들과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결국 [[프랑스]]와의 전쟁 패배([[부빈 전투]])를 기점으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 [[인노첸시오 3세]]의 압력을 받아 1215년 퇴위하고 말았다. 오토 4세의 즉위로 벨프 가문이 다시 전성기를 맞는가 했으나 동맹 관계였던 영국의 [[존 왕]]을 지원하려다 프랑스의 [[필리프 2세]]에게 부빈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하였고 이를 기회로 신성 로마 내부의 패권을 되찾기로 한 [[호엔슈타우펜 가문]]과 그 지지 세력들에게 다시 밀려 퇴위당하고 말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